부상으로 인해 유도 선수를 그만두게 된 이은호(31)는 10여 년 전 즈음에 어머니가 고용인으로 일하며 얹혀살았던 지역 유지 어르신의 가택에 들르게 된다.
종종 어르신의 말동무를 할 겸 찾았던 가택은 오늘따라 분주하다.
그 집안의 장손 고윤제(31)가 13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에 이은호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멈춰 선다.
긴 시간을 돌아온 옛 여름의 기억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.
*
커다란 저택에 얹혀살며 어머니의 일을 돕던 이은호(18)는 처음으로 좋아하는 여학생이 생겨 고백 편지를 쓴다.
하지만 어르신의 서재에서 눈에 띄는 책을 읽어 보다가 그만 편지를 두고 오게 되는데….
다음 날 다시 찾아간 서재, 그 책 속에는 뜻밖에도 답장이 와 있었다.
- 좋아하는 책에 편지가 와 있길래 뜯어 봤어.
누구한테 보낸 건지는 몰라도 내가 먼저 읽어 본 건 사과할게.
그리고 이건 내가 보내는 답장이야.
상대는 정갈한 글씨체로 그가 써 낸 낯 뜨거운 사랑 고백들을 지적하고는 맞춤법까지 고쳐 주었다.
- 우선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한테 다짜고짜 고백하는 거 민폐야. 여자애가 웃어 준다고 그게 네가 마음에 든다는 뜻은 아니거든.
- 그렇다고 네가 쓴 편지가 뭐 그렇게 인상적이지도 않고.
- 기본적인 맞춤법도 못 지키면 그냥 말로 하지 그래.
- 고윤제가.
발신인을 확인한 이은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.
그건 아직 제대로 얼굴도 한 번 못 본, 사랑채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는 이 집안 도련님의 이름이었다. 그것도 까칠하기로 유명한.
그러나 왜인지 편지 속의 고윤제는 소문과는 다르다. 까칠하긴 해도 다정하고 상냥하기까지 하다.
그와 비밀스럽게 주고받게 된 편지 속에서 이은호가 생경한 감정을 싹틔우기 시작한 것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였다.